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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소리 공격에 쓰러진 외교관들…미, 쿠바 주재 대사관 폐쇄 검토

원인을 알 수 없는 끔찍한 소리를 들은 뒤 누군가는 청력을 잃고, 누군가는 균형 감각을 잃었다. 뇌 손상까지 일어났다. 쿠바의 수도 아바나에 파견된 미국 대사관 직원들은 지난해부터 이같은 증상에 시달리기 시작했다. 의학적으로 확인된 사례만 21건이다. 이를 쿠바 정부의 '비밀스러운 공격'이라고 짐작한 미국은 아바나 대사관 폐쇄를 고려하고 있다. 렉스 틸러슨(사진) 국무장관은 17일 CBS 뉴스 인터뷰에서 아바나 대사관 폐쇄 여부를 "검토하고 있다"고 밝혔다. 그는 "특정 개인들이 고통을 받는 피해와 관련한 매우 심각한 문제"라면서 "우리는 그들 일부를 미국으로 데려왔다"고 말했다. 국무부는 지난 2월 쿠바 정부에 이에 대해 공식 항의하고, 5월 2명의 워싱턴 주재 쿠바 외교관에 송환 조치를 했다. 그럼에도 문제가 해결되지 않아 지난달에도 환자가 발생한 것으로 알려졌다. 의회에서는 이미 아바나 대사관을 폐쇄하라는 요구가 고개를 들고 있다. 공화당 의원 5명은 틸러슨 장관에서 서한을 보내 쿠바가 실질적인 행동을 취하지 않는다면 쿠바 대사를 미국에서 추방하고, 아바나의 미국 공관을 폐쇄하라고 요구했다. 틸러슨 장관의 CBS 인터뷰는 이에 대한 답변으로 나온 것이다. 미국이 아바나 대사관을 폐쇄할 경우 국교 단절 이후 50년 만에 대사관을 재개설한 지 불과 2년 만에 다시 문을 닫게 된다. 냉전시대로 다시 돌아가는 셈이다. 쿠바 정부는 의혹을 전면 부인하고 있다. 라울 카스트로 쿠바 국가평의회 의장은 심지어 미 연방수사국(FBI) 요원을 아바나에 보내 조사하라는 파격적인 제안까지 했다. 쿠바 정부 역시 이 사건으로 당혹스럽다는 메시지를 보낸 것이다.

2017-09-18

쿠바 '음파공격' 청력 손상 최소 16명

쿠바 주재 미국 외교관들이 갑작스러운 청력 손상을 호소하며 귀국해 치료를 받은 것과 관련, 국무부가 처음으로 쿠바에 있던 미국인 16명이 음파 공격으로 인한 청력 손상을 경험했다고 밝혔다. CBS뉴스는 24일 헤더 노어트 국무부 대변인이 이날 기자회견에서 쿠바 주재 미 외교관에 대한 음파공격으로 최소 16명이 청력과 경미한 뇌 손상 증세를 겪었다며 현재는 음파공격이 중지됐다고 말했다고 보도했다. 노어트 대변인은 16명에 외교관의 가족이포함돼 있는지는 밝히지 않았다. 노어트 대변인은 또 연방수사국(FBI)이 아직 수사를 벌이고 있지만 쿠바 주재 미 대사관에서 음파공격과 관련한 장비는 발견되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국무부는 이번 사건의 배후로 쿠바 정부를 직접 지목하진 않았지만 쿠바 정부가 '미국을 대표해 공무를 수행하는 미 정부 인력들'을 위험에 노출되도록 했다고 비판했다. 미스터리 같은 이번 사건은 지난 5월 국무부가 워싱턴DC에 주재하던 쿠바 외교관 2명을 추방한 사실이 뒤늦게 드러나며 밝혀졌다. 지난해 가을부터 쿠바 수도 아바나에 있는 미국대사관 직원과 배우자들이 잇따라 설명할 수 없는 청력 손상을 겪기 시작했다. 일부는 증상이 너무 심해 근무를 취소하고 미국에 돌아왔으며 최소 한 명은 영구적으로 청력을 잃을 위험성이 있다는 얘기까지 전해졌다. 수사당국은 몇 개월에 걸친 조사를 통해 대사관 직원들이 귀에 들리지 않는 소리가 나오는 고도의 비밀 음파장치에 노출된 것으로 결론을 내렸다. 다만 이 장치가 고의적인 공격을 위한 일종의 무기인지, 아니면 다른 목적으로 설치한 것인지는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이같은 사실이 알려진 다음날 캐나다 외교부도 아바나 주재 캐나다 대사관 직원도 청력 손상으로 치료를 받고 있다며 미국, 쿠바 당국과 원인을 파악 중이라고 밝혔다. 첨단 음파 무기는 청력손실 증상과 더불어 두통과 구토, 메스꺼움을 유발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렉스 틸러슨 국무장관은 이와 관련 쿠바 정부에 배후가 누구인지 파악할 것을 요청했지만 쿠바 정부는 "우리 영토 안에서 공인받은 외교관과 그 가족들을 상대로 이런 일이 벌어지는 것을 한 번도 용납한 적이 없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며 관련설을 전면 부인하고 있다. 신복례 기자 shin.bonglye@koreadaily.com

2017-08-24

'아바나 미스터리' 쿠바 주재 외교관 잇단 청력 손상

쿠바 주재 미국 외교관들이 잇따라 갑작스러운 청력 손상을 호소한 것으로 알려져 의문이 증폭되고 있다. 이번 사건에 대해 미국 정부가 수사에 착수하고 쿠바 외교관들을 쫓아내는 등 보복 조치에 나서면서 50여년 만에 복원된 양국 외교 관계가 2년여 만에 다시 위기에 빠질 우려가 고조되고 있다. 미스터리 같은 사건이 처음 공개된 것은 9일 헤더 노어트 국무부 대변인의 브리핑 자리에서다. 이날 AP통신에 따르면, 노어트 대변인은 브리핑에서 쿠바 주재 미국 관료들이 알 수 없는 신체 증상을 겪고 있다며 이에 따라 워싱턴DC 쿠바대사관에서 근무하던 2명의 쿠바 외교관을 지난 5월23일자로 추방했다고 밝혔다. 노어트 대변인은 "이 사건을 작년 말 처음 알게 됐다"며 "쿠바 수도 아바나의 우리 대사관에서 근무하던 몇몇 인사들에게 다양한 신체 증상을 유발한 어떤 사건이 있었다는 것을 보고받았다"고 말했다. 노어트 대변인은 연방수사국(FBI)과 국무부 외교경호실(DSS)이 이번 사건을 조사 중이라며 피해자들이 생명이 위험한 정도의 중상은 아니라고 덧붙였다. 구체적으로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에 대해서는 설명하지 않았다. 그러나 AP통신은 지난해 가을 아바나 미국대사관 직원과 배우자들이 설명할 수 없는 청력 손상을 겪기 시작했다며 그 결과 최소 한 명의 직원이 영구적으로 청력을 잃을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고 보도했다. AP통신은 일부는 증상이 너무 심해 여행을 취소하고 미국에 돌아왔으며, 현재 다수의 외교관이 아바나를 떠났다고 전했다. 수사당국은 몇 개월에 걸친 조사를 통해 대사관 직원들이 귀에 들리지 않는 소리가 나오는 고도의 비밀 음파장치에 노출된 것으로 결론을 내렸다. 수사당국은 쿠바 정부기관이 미국대사관 직원 5명의 주거지 내부 또는 외부에 그들의 귀를 멀게 할 의도로 이 장치를 설치했는지를 조사하고 있다. 쿠바는 정부 보안기구를 통해 수백 명에서 수천 명을 상시 감시하고 있는데, 미국 외교관은 최우선 감시 대상이다. 아울러 쿠바 정부의 지휘계통을 벗어난 외부 인사에 의해 '음파 공격'이 이뤄졌을 가능성도 염두에 두고 조사가 진행되는 것으로 알려졌다. 노어트 대변인은 이번 사건을 "매우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다"며 "원인과 영향을 확인하기 위해 노력하는 중"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쿠바 정부는 이런 의혹을 전면 부인하고 있다. 쿠바 외무부는 성명을 내 "쿠바는 우리 영토 안에서 공인받은 외교관과 그 가족들을 상대로 이런 일이 벌어지는 것을 한 번도 용납한 적이 없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며 미국의 자국 외교관 추방을 "부당하고 근거없는 조치"라고 비난했다.

2017-08-10

트럼프 "미국·쿠바 협상 취소"…국교는 유지, 여행은 제한

54년 만에 성사된 미국-쿠바의 국교정상화 기류가 다시 긴장관계로 돌아갈 것으로 보인다. 16일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 2015년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 시절 쿠바와 맺은 국교정상화 협상을 취소하고 여행 등 일부 제재를 복원한다고 공식 선언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날 플로리다 주 마이애미에서 "지금부터 즉시 지난 행정부가 쿠바와 맺은 끔찍하고 잘못된, 편파적인(terrible and misguided, one-sided) 협상을 취소한다"라고 밝혔다. '편파적(one-sided)'이라는 표현은 트럼프 대통령이 외국과의 협상에서 불공정성을 강조할 때 자주 쓰는 표현이다. 한국과의 FTA, 멕시코와의 NAFTA, 러시아와의 무기감축협정 등에서 빼놓지 않고 명시해왔다. 트럼프 대통령은 협상 취소와 제재 강화를 천명했지만 양국 간 국교정상화 협상 전체를 뒤집지는 않았다. 쿠바와의 국교는 유지하되, 미국인의 쿠바 개별 여행을 제한하고, 쿠바 군부 또는 정보당국과 연계된 기업과 미국인의 금융거래를 금지하기로 했다. 미국의 자금이 쿠바 군부에 흘러드는 것을 방지하기 위함이다. 워싱턴에 있는 쿠바 대사관과 쿠바 수도 아바나의 미국 대사관도 그대로 유지하기로 했다. 쿠바와 미국 사이 항공편과 크루즈편 운항도 계속된다. 또 트럼프 대통령의 반 이민정책과 맥을 같이 하는 쿠바인의 미국 불법이민 우대 정책인 '젖은 발 마른 발(wet foot, dry foot)' 정책은 폐기 상태를 유지하기로 했다. 오바마 정부는 2014년 12월 쿠바와의 관계복원을 선언한 뒤 이듬해 5월 쿠바를 테러지원국 명단에서 33년 만에 삭제하고 같은 해 7월 외교단절 이후 54년 만에 아바나에 미국 대사관 문을 다시 열었다. 이후 여행 및 금융거래 부문 자유화 우편서비스 재개 쿠바 직항편 운항 등의 조치를 단계적으로 취해왔다.

2017-06-16

트럼프 결국…미-쿠바 국교 정상화도 원점으로

반세기 만에 적대 관계를 청산하고 국교 정상화의 길을 걸어온 미국과 쿠바가 다시 과거의 냉각기로 되돌아가게 생겼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대선기간 자신의 공약대로 전임자인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이 라울 카스트로 쿠바 국가평의회 의장과 맺은 국교 정상화를 위한 조치의 대부분을 폐기할 것으로 알려졌기 때문이다. 정치전문매체 폴리티코는 15일 트럼프 대통령이 오늘(16일) 플로리다주 마이애미를 방문하는 자리에서 쿠바 여행 금지는 물론 사실상 쿠바 군사정권의 통제하에 있는 쿠바 기업들과의 거래를 금지하는 내용의 대쿠바 관계 원상복귀 조치를 발표할 계획이라고 보도했다. 폴리티코가 입수한 쿠바 관련 8쪽짜리 대통령 지시각서 초안에서 트럼프 대통령은 "내 정부의 (쿠바) 정책은 미국의 국가이익과 더불어 쿠바 국민과의 연대에 따라 추진될 것"이라면서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미국의 자금이 자유롭고 공정한 사회를 위한 가장 기본적인 요건조차 갖추는 데 실패한 정권으로 흘러들어 가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폴리티코는 트럼프 정부의 이 같은 대 쿠바 정책은 미국인 여행객들이 쿠바 수도 아바나에서 럼주를 마시는 날이 곧 끝날 것임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전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쿠바와의 국교 정상화 협정 대부분을 무효로 하되 형식적인 외교 관계 자체는 단절하지 않을 것으로 알려졌다. 오바마 정부는 2014년 12월 적대 관계 청산 및 쿠바와의 관계복원을 선언한 뒤 이듬해 5월 쿠바를 테러지원국 명단에서 33년 만에 삭제하고 같은 해 7월 외교단절 이후 54년 만에 아바나에 미국 대사관 문을 다시 열었다. 이후 여행 및 금융거래 부문 자유화 우편서비스 재개 쿠바 직항편 운항 등의 조치를 단계적으로 취해왔다. 트럼프 대통령이 쿠바와의 관계를 원점으로 되돌리려는 것은 양국 정상화 협상이 쿠바에만 유리한 조건으로 진행됐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후보 시절 쿠바가 향후 관계 복원 협상에서 종교와 정치적 자유 보장 정치범 석방 등 특정 요구조건을 수용하지 않으면 단교까지 검토하겠다고 경고했지만 이에 대해 쿠바는 여전히 난색을 보이고 있다.

2017-06-15

쿠바의 한인들은 항상 '아리랑을 불렀다

*한국인 커뮤니티는 강한 결속력이 있었나? 마사=우리는 많은 한국 어른들과 동질감을 느꼈다. 그런데 그 당시에는 아버지가 왜, 그리고 어떻게 한국임을 느끼는지 설명하는 걸 잘 이해하지 못했다. 우리 가족과 다른 한국인 가족들의 삶은 엘볼로라는 농업 마을을 중심으로 돌아갔다. 그곳의 한국인 마을은 마탄사스에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카네나즈나 아바나로 이주했으나, 크리스마스 때나 삼일절이 되면 엘볼로로 돌아와 우리와 함께 축하하고 기념했다. (비비안 루이즈는 마사의 딸이고 토목 기사이다. 비비안의 이야기를 들어 보자.) 비비안=나는 100% 쿠바 사람이다. 한국은 내가 자라온 환경과는 동떨어져 있다. 그러나 부모님이 쿠바에 사는 한국인들에 관한 책을 쓰신 이래로 우리는 한국인들과 친밀하게 교류하고 있다. 지금은 한국을 방문하고 한국에 대해 배우는 것이 매우 즐겁다. *당신의 학력과 직업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달라. 마사=아버지는 웅대한 뜻을 품은 분이었다. 교육을 우선시했고, 특히 여자들도 교육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교육을 받지 못한 여성들은 남의 집 하녀가 되거나 바나 카페에서 일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아버지의 영향 때문인지, 자라면서 학교가 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을 차지했다. 교원자격증을 따기 위해 나는 열심히 공부했고 무사히 시험에 통과했다. 단 90명만 뽑는 시험에서 1000여 명의 지원자들이 팽팽히 겨루었다. 지원자 중 많은 사람들은 그 전해에도 지원했던 경험자들이었다. 나는 운 좋게 지원한 해에 바로 통과했고, 1956년에 졸업했다. 나는 시골 지역인 마탄사스에 있는 학교에서 일했다. 첫 학교에서 나는 서로 다른 학년의 학생들을 가르쳤다. 쿠바 혁명 이후 중등교육과정을 공부했기 때문에 중학교에서 스패니시를 가르칠 수 있었다. 그리고 교육학과 심리학도 공부했다. 마탄사스에 교육학 대학이 설립됐을 때, 나는 그곳에서는 마르크스 철학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나의 관심사는 철학으로 귀결됐고 마르크스 철학을 연구하는 교수가 되었다. *쿠바 혁명 때 어떠했나 마사=우리 사회가 바뀌지 않았다면 나의 삶은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종종 한다. 나는 혁명 때문에 지금 하고 있는 일을 할 수 있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많은 문제와 어려움들이 있었지만 혁명이 일어났기 때문에 오늘날의 내가 있는 것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대학에도 진학할 수 없었을 것이고 대학교수는 꿈도 꿀 수 없었을 것이다. 어머니는 학교에 다니신 적이 없었으나, 어깨너머로 책 읽는 법을 배우셨다. 쿠바가 알파벳 캠페인을 시작할 때, 이미 아홉 명의 자녀를 둔 상태였음에도 불구하고 어머니는 쓰기까지 배우기 시작하셨다. 토마스=혁명 전에 우리는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었다. 우리 주변에는 의사도 학교도 제대로 없었다. 자원봉사자들이 이곳에 멋진 학교를 세웠고, 우리는 의사에게 진료도 받을 수 있다. 여전히 쿠바는 식량 부족으로 어려운데 우리는 교육이나 의료의 혜택을 누리고 산다. 비비안=아마 완벽하진 않겠지만 기분은 좋다. 내가 원했던 것들을 거의 끝냈다. 나는 원하는 것을 공부했고, 공부하고 싶은 곳에서 공부를 했다. 혁명 이후 쿠바 교육 시스템은 모든 사람들이 학교에 다니도록 했다. (아델리나 임 하이는 의사이고 프리미티보의 딸이다. 아델리나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아델리나=의료 제도에 있어서 우리는 여전히 많은 문제를 안고 있다. 하지만 보편적인 의료 서비스이고, 문제들을 지속적으로 의논해 발전시켜나갈 수 있을 것이다. 프리미티보=나는 혁명 이전과 이후 모두 좌절감을 느꼈던 사람 중 하나이다. 나는 그때 군대에 있었고, 무슨 일이 일어날 것 같은 예감에 사로잡혀 있었다. 혁명으로 커다란 변화가 올 것이라고 믿었고, 그 변화가 세상을 구원할 것이라고 오랫동안 믿었다. 혁명이 시작되었을 때 나는 29세였다. 혁명은 많은 좋은 변화를 가져왔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가 가지고 있지 않았던 것에 대하여 보상을 받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매일 성공을 위해 25년 동안 열심히 일했지만, 현재의 모든 것들이 반드시 옳다고 믿지는 않는다. 혁명을 지지하기 위해서라도 적어도 95%의 사람들은 매우 열심히 일했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혁명을 통해 크게 얻은 것은 없다. 우리는 격렬히 투쟁했지만, 많은 것을 얻으려 할수록 더 깊은 상처를 받았다. 마치 속아 넘어간 기분이 든다. *많은 사람들이 쿠바를 떠나는 이유를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마사= 봉쇄정책으로 기인한 경제적인 이유로 사람들은 쿠바를 떠나고 싶어한다. 우리는 음식이나 옷 등 거의 모든 생필품에 있어 선택이 제한되어 있다. 어린 세대들은 다른 나라에 살고 있는 친구와 친척들에게서 많은 이야기를 듣는다. 쿠바 밖의 사람들은 원하는 것을 좀 더 누릴 수 있다고 한다. 그래서 젊은 세대들은 쿠바를 떠나기를 더 원한다. *현 쿠바 정권에 있는 사람들은 발전에의 의욕이 없다고 들었다. 정말 그러한가 프리미티보=사람들은 대개 삶의 목표를 지니고 산다. 그러한 목표 없이는 생존의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또한 인간들은 가지고 있는 것보다 더 많이 갖기 위해 노력한다. 자본주의적 사고에서 보자면 일을 할 때 좀 더 높은 직위에 올라 가려는 욕구가 일반적이다. 그 욕구를 채우기 위해 더 열심히 일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의욕조차 없다면 무엇을 위해 투쟁하겠는가? 마사=이것은 관점의 문제이다. 한국인 부모의 전통과 유산을 물려받은 쿠바 전문직의 사람들을 봐라. 우리 가족에도 두 명의 의사, 건축가, 그리고 세 명의 엔니지어가 있다. 모두 직업적으로 전문가들이 되었다. 스위스에 있을 때 빵집을 간 적이 있었는데, 다양한 상표의 빵과 차들이 있었다. 쿠바에서 그러한 선택의 여지를 가질 수 없었다. 하지만 그러한 다양함이 꼭 필요할까? 물론 완벽하지 않더라도 쿠바는 발전을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는 중이다. 비비안=나는 이곳에서 모든 것이 완벽하다거나 쿠바가 세상에서 가장 좋은 곳이라고 믿지 않는다. 내가 아는 한 이곳보다 좋은 곳들이 있고, 그곳에서는 사람들이 사회주의와 자본주의의 장점을 아우른 것들을 공유하며 누릴 수 있다고 생각한다. 토마스=나는 세 명의 딸과 다섯 명의 손자들을 뒀기 때문에 굉장한 부자이다. 지난 달 29일은 내 생일이었다. 그날 모든 가족이 함께 모인 것이 정말 행복했 다.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다. *애석하게 느꼈던 것들이 있다면 마사=개인적으로 나에게 시간이 조금 더 있었으면 좋겠다. 우리는 사회문제로 인해 너무 많은 에너지를 소모했다. 우리들 스스로를 돌아볼 충분한 시간이 없었던 것 같다. *바람이 있다면 마사=내가 바라는 것은, 남편에겐 내가 필요하기 때문에 그가 죽을 때까지 내가 살아있었으면 좋겠다. 라울은 희귀한 뇌질환을 앓고 있다. 그래서 내가 그를 위해 모든 것을 해주어야 한다. 내 인생의 목표는 죽는 날까지 남편을 잘 돌볼 수 있는 힘이 있었으면 하는 것이다. *라울의 병 때문에 힘든 적이 있었나 마사=아니 절대 없다. 어떤 사람들은 나를 불쌍히 여기지만 나의 도움과 사랑 이 필요한 사람과 함께할 때 나는 오히려 많은 것을 배우고 강해진다.(라울은 2005년 11월에 세상을 떠났다.) *한국에 방문했을 때 아버지 대신 수상했던 일을 이야기해달라. 마사=1996년에 한국을 방문했다. 한국에 간 경험은 하느님이 주신 선물과도 같다. 내가 살아생전에 한국을 방문할 수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그랬기에 한국에 도착했을 때 무척 기뻤다. 아버지가 얼마나 오고 싶어하시던 곳인가! 아버지 때문만 아니라, 귀향을 꿈꿨지만 다시 한국으로 되돌아갈 수 없었던 모든 쿠바 한인들이 떠올라 엄청 울었다. 그분들은 '아리랑'을 매일같이 불렀다. 우리 어머니 또한 요리할 때건 청소할 때건 항상 부르던 곡이 바로 아리랑이었다. 부모님이 많이 생각났다. *한국에게 바라는 점이 있다면 토마스=우리는 남북한에 대해 아무런 배경지식이 없다. 부모님이 이곳으로 건너올 당시에는 한국이 분단국가가 아니었다. 우리는 한국인 커뮤니티가 있다는 것 자체에 기뻐했고, 아무도 북한, 남한 출신으로 편 가르지 않았다. 우리는 모두 그냥 한국인이자 한국이었다. 통일된 한국을 볼 수 있다면 최고로 기쁠 것이다. 이경원 저·장태한 역 '외로운 여정'에서 전재 김영옥 재미동포연구소 제공 정리= 장병희 기자 ◆책구입: hotdeal.koreadaily.com

2017-06-14

큰 돈 번다고 철썩같이 믿고 쿠바로 이주

어려서 두 벌의 드레스 가져 하나는 한복, 다른 하나는 교복 오전에 한국학교에 갔기에 2세들 누구나 한국어 유창 유대인들은 2000 년이 넘도록 종교적 박해를 당하고 세계대전 중엔 대량 학살을 겪었다. 또한 그들은 세계 도처에서 추방을 당해 빈민가로 몰리면서 사회의 천덕꾸러기로 세상을 헤매고 있다. 그러나 미국에 있는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그들이 열망했던 정상인의 삶을 성취해냈다. 지금 쿠바 땅에서 '아리랑'은 잊혀지지 않은 노래로 전해진다. '아리랑'은 20세기 시작과 함께 고국을 떠나 시베리아, 만주, 중국, 미국, 멕시코, 쿠바, 일본, 중앙아시아, 유럽, 남미, 아프리카, 호주 등지로 이주한 한인들에게서 들을 수 있다. 지난 10년 동안 대략 50만 명의 북한 주민들이 중국, 러시아 등 주변 국가들로 탈출했다. 그들은 마치 후기 스탈린 수용소를 방불케 하는 김정일 치하의 혹독한 북한 생활에서 벗어나기 위해 위험한 탈출을 감행한 것이다. 대부분의 여성 망명자들은 생존을 위해 성노예로 전락했다. 게다가 세상은 이들의 안위에 어떠한 관심도 쏟지 않았다. 이렇게 비참한 사람들의 한은 우리를 눈물짓게 만든다. 뉴욕에 거주하는 한국계 영화감독 김대실은 쿠바를 방문해 통역관 최애영과 함께 그곳에서 노예로 살았던 한인들의 후손인 김마사를 비롯해 한국계 3세들을 만나 지금까지 밝혀지지 않았던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쿠바 한인들의 한을 밝혀냈다. *당신과 가족들, 그리고 가족의 배경을 말해달라. 마사= 나는 쿠바에서 태어나고 교육받은 쿠바인이다. 그리고 쿠바에서 저명한 작가인 라울 루이즈와 결혼했다. 그러나 내 근본은 한국에 있다고 믿는다. 나의 한국 이름은 임은희이다. 우리 아버지는 한국 커뮤니티 리더 중 한 분이었다. 아버지의 이름은 임천택이고, 스패니시 이름은 엘네스토 림이었다. 아버지는 한국의 정체성과 문화를 보호하기 위해 활동했다. 아버지의 활동은 내게 큰 영향을 미쳤고, 덕분에 나는 스스로 한국과 매우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고 느낀다. 그래서 내 자신을 한국인 뿌리를 가지고 있는 쿠바인으로 인식하는 것이다. 어머니의 이름은 김가히, 스패니시어 이름은 구델리아 김이었다. 어머니가 여덟 살 때 외조부모님과 어머니의 가족들은 멕시코로 이주했다. 어머니는 열네살에 아버지와 결혼을 했고, 바로 첫 아이를 가졌다. 어머니는 총 아홉명의 아이를 낳았고, 바느질과 세탁일을 하면서 항상 아버지를 도왔다. 나는 외할머니를 만나본 적이 없었다. 어머니는 외할머니가 멕시코에서 임종했다면서 외할머니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곤 했다. 외할머니는 교육을 받지 못했고 몹시 가난한 집안 출신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자식 교육에 있어 굉장히 엄격했고, 높은 도덕적인 규범을 지키며 살았다. 외조부모님과 어머니의 가족들은 시골 지역에서 매우 가난하게 살았다. 어느 날 아이들이 멜론 밭에 가서 하나를 서리해 집으로 가져오니, 외할머니는 매섭게 혼을 냈다. 그래서 아이들은 서리한 멜론을 도로 주인에게 돌려주었다. 그날 어머니의 집에선 어떤 사람도 밥을 먹지 못했다. 멜론 서리에 대한 벌이었다. (이호영 토머스는 쿠바에서 태어났다. 현재 73세이고 그의 아버지는 1921년에 멕시코를 떠나 쿠바로 왔다. 토머스가 들려주는 자신의 가족 이야기를 들어보자.) 토머스= 우리 아버지는 돈을 많이 벌어 한국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말을 철석 같이 믿고 쿠바로 이주했다고 한다. 하지만 아버지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고작 애니깽을 베는 일밖에 없었다. 아버지는 아들 넷과 딸 셋 총 일곱 명의 자녀를 두었는데, 나는 그중 세 번째 자녀다. 보통 이곳에서 만날 수 있는 대부분의 한국인들은 일을 찾아 여러 마을로 퍼져 살고 있다. 우리 가족은 작은 나무 집에 살았다. 우리 어머니는 멕시코에서 태어났고, 아버지와 그곳에서 만났다. 어머니와 아버지는 아주 고된 시간을 보냈다. 애니깽 베는 작업이 끝났지만 부모님의 수중엔 한 푼도 없었다. 그래서 아버지는 임금을 좀 더 받을 수 있는 다른 일을 구해야만 했다. 또 가난 때문에 세상을 떠난 가족의 장례식을 위해 돈을 빌려야만 했다. (김루시아는 쿠바에서 태어났고, 그의 부모는 멕시코 출생인 한국인들이다. 훗날 루시아는 쿠바 군대에 입대했다. 루시아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김루시아=우리가 어렸을 때 조부모님은 어떻게 우리가 멕시코에 오게 되었는지를 이야기해주었다. 어머니는 종종 할머니와 외할머니가 부잣집 출신이었다는 것을 말하곤 했다. 할아버지는 기갑부대의 군인이어서 말도 몰았다고 한 다.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멕시코에서 더 부자로 살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으로 이곳에 왔다. 그러나 그들은 멕시코에 도착하마자 노동에 시달려야 했다. *자랄 때 기억에 대해 좀 더 들려달라. 마사= 나는 우리 집에서 여섯 째 아이였다. 나에겐 두 벌의 드레스가 있었는 데, 하나는 한국 설날에 입었고, 다른 하나는 교복이었다. 학교 갈 때 신는 신발도 따로 있었다. 가난했지만 우리는 행복했다. 다른 사람들이 얼마나 풍족하게 사는지 몰랐었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우리는 사랑을 많이 받고 자랐고 형제자매끼리 우애도 좋았다. (김프리미티보는 1930년에 태어난 마사의 큰오빠이다. 프리미티보는 네 명의 딸을 홀로 키웠다. 그의 딸들은 잘 성장해 정부에서 일하거나 의사, 건축가로 일한다. 프리미티보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프리미티보=나는 한국 학교를 다녔었는데 그곳에서는 환갑과 같은 특별한 날을 기념하기도 했다. 우리는 한국의 전통 음식과 언어 등을 지키려고 노력했다. 나는 6학년에 학교를 그만두었다. 그러나 훗날 다시 입학해 고등학교 과정까지 마쳤다. 나는 지금 퇴직을 했다. 대학 교육을 받지는 못했지만, 나는 열심히 일하는 사람이었다. 또 어느 누구에게나 좋은 인상을 줬다. 열심히 일했기에 백 개가 넘는 소수집단 기업들을 관리하는 직책 중 주정부에서 가장 높은 자리까지 올라갔다. 토머스= 우리 모두 한국어를 할 줄 안다. 아침에는 한국 학교에 가고 오후엔 쿠바 학교를 다녔기 때문이다. 1955~56년까지 두 군데 학교를 오가며 공부했다. 만약 그곳을 떠나지 않았다면, 우리 집들은 불에 타 없어졌을 것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아바나, 산티아고, 그리고 다른 지역들로 흩어졌다. 우리가 마을을 떠난 후에, 몇몇은 다른 곳에서 일을 찾았다. 나는 아바나에 있는 식당에서 설거지를 했다. 어머니와 여동생들은 세탁을 해서 돈을 벌었다. 그렇게 번 돈으로 생계를 꾸려나갔다. 어머니는 돈을 모아서 큰형이 작은 가게를 살 때 주었다. 형은 가게를 2년 동안 잘 운영하고 나서 내게 물려주었다. 작은 집에 살았지만 우리의 삶이 점점 나아짐을 느꼈다. 1956년에 나는 로지와 결혼했고, 1남 2녀의 자녀를 두었다. 세 명의 아이들은 모두 대학을 졸업했고, 엔지니어가 됐다. 아이들은 모두 쿠바인과 결혼해 다섯 명의 손자, 손녀가 생겼다. *자라오는 동안 특별히 한국적이라고 느꼈던 것이 있었나? 마사= 어머니는 우리에게 바느질과 요리하는 법을 가르쳐주셨다. 집에서 우리는 항상 한국 음식을 먹었다. 쿠바에 있는 한국인들은 멕시코의 영향을 받았다. 한국인들은 매운 음식을 좋아하는데, 멕시코인들은 그보다 훨씬 더 매운 음식을 먹었다. 그래서 한국계 쿠바 음식은 몹시 맵다. 집에서 우리는 기본적으로 고추장, 김치를 곁들여 먹었다. 장과 김치는 독에 보관했다. 우리는 생일날이나 삼일절 등 특별한 날이면 한국 전통 음식을 해 먹었다. 한국인 커뮤니티에서 삼일절은 매우 중요한 날이라 반드시 기념했다. 이경원 저·장태한 역 '외로운 여정'에서 전재 김영옥 재미동포연구소 제공 정리= 장병희 기자 ◆책구입: hotdeal.koreadaily.com

2017-0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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